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2월 9일. 방송과 백조

목향 2009. 4. 12. 14:34

제목 : 2003. 12월 9일. 방송과 백조

"요즘 방송 잘되죠?"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방송국 직원이 인사를 해왔다.
"네에~~ 그럼요. 너무 재미있어요" 라고 내가 대답했다.

"하긴 그냥 노래만 쭉 틀면 되니까 뭐 어렵겠어요?" 라고
그 직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웃었다.

자기분야가 아니니, 방송을 진행해 가는 것에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써야할 일이 많은지 등을 알 수가 없을테니
아무런 설명을 하지도 못했고
또 한다해도 이해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하루 두시간의 방송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래들을 들어보고 골라내 선곡을 하고
순서를 정할때도 그냥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곡의 분위기가 어떤지, 어떤 악기로 연주되고,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그래서 다음곡은 먼저의 곡과 악기편곡, 곡의 분위기, 내용이
어울리는 곡으로 틀어야하고

템포가 빠른 노래와 느린노래를 절묘하게 배합하고
여자가수의 노래와 남자가수의 노래도 적절하게 배치해야하며
또 그외에도 이루 다 설명할 수 없는
세세하게 신경쓰고 큐씨트를 짜내야하는 복잡함을
방송담당자가 아닌 이상 알리가 없을 것이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도 스튜디오는 정신없이 바쁘다.
전화로 신청해오는 곡들이 더 많기 때문에
그 신청곡들을 적절하게 어느 순서에 넣어야하는지
순간 순간 판단해야하고
어떤 말로 진행 분위기를 바꿔야 하며
순조롭고 부드럽게 진행되도록 하기위한
재빠른 머리회전과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방송이다.

특히 나는 노래가 중간에 잘리는 것은 청취자에게도 가수에게도
실례라고 생각되어 최대한 노래 전곡을 다 들을 수 있도록
각 곡들의 시간과 방송을 마쳐야하는 시간을 계산해서
몇분 몇초에 내 말을 끝내고 정확한 시간에 노래를 틀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디와 나는 방송중에
큐시트를 앞에놓고 매일 산수를 한다.
1.2.3.4부 방송이 끝나는 시간이 이미 정해져있어
그 시간에 맞춰 조절을 해야만한다.
만약 2부가 끝나는 시간이 7시 59분 40초라고 한다면
끝곡으로 틀 노래가 3분 15초짜리일 경우
나는 재빠르게 산수를 해서 7시56분 25초에 사연과 곡소개를
끝내야 곡 전체를 끝까지 다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방송을 진행하는 동안 내 눈은 디지털 시계를 의식하고
1분 10초 동안 말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고
단 7초안에 소개를 마쳐야하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3분 가까이 말을 해서 시간 조절을 해야하는 것도
진행자의 몫이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지나갔을 때는 양해를 구하며 곡소개를 한다.

그러나 단 1초도 틀림없이 딱 제시간에 맞춰 곡 소개를 하고
방송을 마쳤을 때,
그래서 노래의 전체, 마지막 fade out 부분까지 딱 맞으며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미 디지털로 저장된 방송공지나 광고가
물흐르 듯 이어질때의 희열과 충족감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인 것이다.
그렇게 방송을 마치면 스탭들 모두 박수를 치며 기뻐하고
상쾌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나는 방송진행을 백조의 우아한 움직임과 간혹 비교하곤 한다.

백조가 아주 우아한 자태로 물위에 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물밑에서는 정신없이
두 발을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방송도 듣는 분들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또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으로 들으시겠지만
방송 스튜디오에서는 백조의 물 속 발처럼
철저하게 초 단위를 계산하고 어울리는 음악을 선곡해야하며
순간 순간 바뀌는 신청곡을 찾아내
알맞은 자리, 알맞은 시간에 소개해야 하는 등의
정신없는 움직임이 있고 치밀한 계산이 있어야 한다.

다른 방송프로그램들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동안 내가 진행해왔던 프로그램은
이러한 나의 기본과 원칙을 따라왔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신경써야하는 부분들이 있으니....

"뭐 음악만 쭉 틀면 되는 프론데 어려울 게 있겠어요?" 하는 말에
그저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 난 말야, 예전에는 무심히 방송을 들었었거든?
그러면서 노래가 중간에 끊기면 짜증나더라구.
근데 너 방송하는 거 보니까, 아... 이렇게 몇초까지도 계산해야하는
치밀함이 있는 거구나.... 라는 걸 알게됐지 뭐니.
그래서 다른 방송 들을 때, 노래 앞부분 조금 나오다가 끊기고
광고나오고 그러면, 아, 이 진행자는 시간계산을 안하는구나...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방송 듣는다니까?
무심히 지나쳤던 몰랐던 걸 알았다, 얘~~" 라고 말이다.  

그리고 정해진 대본이 없는 방송은 더욱 더 재미를 가한다.

오늘도 방송을 마치고 나는 행복했다.
잠을 못자 혼미하고 피로했던 것도
방송을 진행하며 모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복잡하게 머리쓰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하며 보람을 느끼고
내일은 어떤 곡을 소개할까 하는 준비를 하면서
보내는 생방송의 시간들이야말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방송으로인해 복잡한 주변의 일들과 쌓인 피로를 잊었고
그래서 오늘 나는 행복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