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2월 7일. 왜 그럴까.....

목향 2009. 4. 12. 14:29

제목 : 2003. 12월 7일. 왜 그럴까.....

나는 아마도 오늘 신경이 꽤나 날카로운 상태였던 것 같았다.

내 마음의 상태를 계속 관찰하며 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리고 성급한 말 한마디로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자고
내 스스로 다독였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남이 내마음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남의 일처리 방식이 나 같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이니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내 마음을 볶지 말자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벌써 열흘도 훨씬 전,
어떤 행사에 관한 섭외가 들어왔고
그것은 나와만 연관 된 것이 아니라
다른 팀과도 연결된 것이었다.
나는 못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내가 연락을 담당했던 팀은 시간을 내보겠다고 했었다.
그것도 남아도는 시간이 아니라
겨우 조절을 해야만 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섭외가 걸려있으면 당사자들은 당일 스케쥴을 확정하지 못한채
무작정 비워두고 다른 행사도 고사해야하며
손해를 보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각종 행사로 바쁜 연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행사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없는 지 꽤 시간이 지났다.
도대체 일을 한다는 것인지, 만다는 것인지,
가타부타 답을 해주고 스케쥴을 확정지어야 할텐데
연락이 없어, 중간에 끼인 나는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격으로
어제 밤, 나는 행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기로 하신 거예요?" 라고 묻자
그 행사 담당자는 자기가 지금 바쁘니, 5분 후에 내게 전화를
주겠다고 약속했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다.

1시간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않았다.
다시 걸어봤더니 기막힌 대답이 들려왔다.
"누구 누구랑 식사하러 나가셨는데요"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처음 내게 전화를 해서 통사정을 할 때는 언제고
도대체 지금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나는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단순히 나만 연결된 일이라면, 그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와 상관없이, 그저 내 연락을 받고 무턱대고 기다리고 있는
다른 팀에게 빨리 답을 줘야하는 나로서는
미안하기 짝이없는 노릇이었다.
더 이상 받지 않는 전화를 계속하기에는 시간이 늦어
포기하고 오늘을 맞았어야했다.
그리고 오늘은 어떻게든 확답을 들어야 했다.

행사담당자와 연결이 되었다.
"아니, 5분후에 전화하겠다고 해놓고 그렇게 약속을 안지키면 어떡해요..
저는 아무일도 제대로 못하고 기다려야 했잖아요 휴대폰도 안받고..."
내가 말했다.

그랬더니 그 담당자의 말은 나에게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못느끼게 했다.
" 아, 네에~~ 휴대폰에 문자메세지가 계속 들어오는데....
나중에 보면 되지 뭐, 하고 못봤지 뭡니까. 식사중이어서 말이죠...."
나는 바로 이 말에 소위 '환멸'이라는 것을 느꼈다.

"저는 문자 멧세지 보낼 줄 모르는데요? 보낸적도 없구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상대방이 거짓말한 것이
들통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핑계를 대더라도 좀 그럴 듯하게 대지......'

"제가 한시라도 빨리 그 팀한테 결과를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거든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라고 물었다.
행사관계자의 대답은 행사가 취소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 바빠서 내게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팀은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데요 뭐....."
그리고 논리에 맞지않는 변명을 했다.

"그럼 진작에 알려주셨어야죠. 다른 팀은 스케쥴도 못잡고
저와의 의리때문에 무작정 기다리기만 했잖아요.
그리고 인기가 그리 없다고 그렇게 무시하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세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무척 순진하고 세상물정 잘 몰라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인격적 모독을 하며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어쨌든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무척이나 허탈했다.......
바쁜 것은 그사람의 상황이고, 행사가 취소되었다면 응당 먼저
그 소식을 알렸어야 하는 일인 것이 도리인데
그는 그저 자신이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을 피하는 것으로
문제를 얼렁뚱땅 넘어가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세상에 그사람만큼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지금 할일이 딱히 없는 백수라해도 그 사람의 시간은 귀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얼마나 피해를 입던, 얼마나 마음을 졸이던,
다른 사람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는 듯 싶었다.

그런사람에게 이러쿵 저러쿵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꼈고
나는 담담하게 잘 알았다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숙제는
내가 연락해서, 나를 믿고 시간을 비워둔채 기다렸던 팀에게
행사가 취소되었다는 결과보고를 해야하는 미안한 일이었다.

엄밀히 따지고보면
처음 섭외를 부탁했던 담당자가 미안하다는 전화를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게조차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이리도 미안해하며 죄인이 된 듯한 심정으로
그 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게 됐다고
사정을 하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단 말인가.....

그리고 유명인이면 예의있게 전화를 하고
유명하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버려도 괜찮다는 얘기란 말인가....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일까?

정말 나는 씁슬했다.
자기가 필요로 할 때는 온갖 것을 다해줄 것처럼 아부를 하고
필요성이 떨어졌다고 판단되면 나 몰라라 하고
가차없이 냉정하게 변해버리는 사람의 마음.......

그런일을 수차례 겪다보니
나는 점점 언더그라운드가 아름답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얼마나 순수한 세상인가.....
돈과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만족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이 넘쳐, 돈과 상관없이 서로 돕고
콩나물 해장국 한 그릇으로도 충분하고
음악으로 배부른 사람들.....
방송을 거부하는 사람들......
적어도 그 안에서는 약속을 하고 자신이 곤란할 때면
나몰라라 회피하고 그 순간을 넘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드믈다.
치열한 사회의 경쟁에 휩쓸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위해
언더그라운드를 택한 사람들에게는 자존심과 고집이 있다.
예술성도 뛰어나다.

나도 그곳에 머무르고 싶다......

조금 날카로왔던 신경은 어떻게든 문제가 해결되면서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교훈을 얻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책임감이 없을까?
그러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까?
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