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2월 4일. 설움을 외면하려...

목향 2009. 4. 12. 14:26

제목 : 2003. 12월 4일. 설움을 외면하려...

최근 탤런트 이미경씨의 암발병과 투병과정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며
각 방송사로부터 내게 인터뷰 제의가 여러 건 있었다.

"제가... 무슨... 격려를 드릴만한 자격이 있나요?"

그랬다.
아픈이의 투병과정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안타깝고
또 아프지만,
실제로 아픈 이에게는 당장, 다른 사람의 어떠한 격려도
실은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대신 아파줄 수 없고
죽음보다 고통스러울 것 같은 투병기간을 보내야하는 환자의
절대적 고독, 외로움은
통증보다 더 커다란, 필수적으로 견뎌내고 넘어야하는 산 같은 것이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할 수만 있을 뿐,
나는 격려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요즘 유행처럼 방송되고 있는
시한부 인생의 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는
일체 안본다고 언니에게 말했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내가 처절하게 암으로 투병할 때와 너무나도 비교되는,
나로서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사랑과 간병의 모습이
보여질 때마다 내 설움이 복받쳐 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집에 혼자 버려져 있다시피 유기되어 있었고
통증과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비명을 질러댈 때조차
나를 잡아 줄, 어떤 손도 없었다.
..........

그것은 감옥에 감금되어 있거나
상상으로만 그릴 수 있는 지옥에 떨어져있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방치 유기되어 있는
암 환자인 내 실상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가족들도 알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잘 지낸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가족들은 가슴을 쳤다........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들은 나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낯선 장면들일 뿐이었다.

누군가...
내 병실 침대 한쪽 구석에서 쪼그리고 밤새 지켜준 일이 있었던가...
통증으로 울부짖는 나를 보며
등이라도 쓰다듬어 준 이가 있었던가.....
내 손이라도 잡고 그저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있었던가.....

내게 그런 이는 없었다.

직장일로 바쁜 언니가 매일 먹을거리를 만들어와
억지로라도 몇 숟가락 먹이고야만 병실문을 나섰던 일.
그것이야말로 감동하고 고마워해야할,
평생 잊지못할  간병이었다.

처절했고 고독했고 기망당했고 학대,유기되었던
내 혼자만의 외로운 투병과정을 자꾸 떠올리며
비교하게되고
그럴수록 설움이 밀려와
나는 애써 드라마를 외면한다고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처음으로 다시 되돌릴 수도 없으며
이미 가슴에 한 이되어 남아버린 일.
그 지독한 기억들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아내와 그 남편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는 어떤 것도 보기 싫었다.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간병 장면 중 어떤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간병을 받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설움에 겨워
내 설움에 겨워.....
아예 TV를 켜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내 설움을 외면하려, 애꿎은 드라마와 방송사를 탓하고 있다.

"왜 요즘 들어, 하필 이런 드라마만 만드는 거야!"

다른이에게는 감동적이고 재미있는 드라마일지라도
내게는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니
설움을 외면하려 노력하는 것 뿐이다.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시간이 덕분에 늘었다.
그리고 그 때 그 처절하던 홀로의 투병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하고 생각하기로했다.
내 언니가 늘 옆에 있어주고
등도 두드려주며 약도 챙겨주고
손도 잡아주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내 설움을 외면하려
지금의 삶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펼쳐보았다.
그래....
나는 그 악몽같은 긴 터널을 어떻게든 지나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 탤런트 이미경씨의 쾌유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