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2월 2일. 역지사지

목향 2009. 4. 5. 15:06

제목 : 2003. 12월 2일. 역지사지

오늘도 어김없이,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경미한 자동차 접촉사고의 현장을 지나쳤다.
그때문에 도로는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없을 것처럼 늘어서 기어가듯 하고있었다.

"저 정도면... 양쪽 차 모두 아무렇지도 않구만....
기분은 물론 불쾌하겠지만 서로 양해하고 갈길을 가도 될텐데...."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아마, 나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도 모르고 밀리는 도로에서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해야하는
수많은 차량 운전자들의 입장을 잠깐만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피해도 없어보이는데 원만히 해결하고 자동차를 운행하는게
두대를 각자 세워놓고 도로로 나와 언성을 높이고
"너 도대체 몇살이나 먹은게 반말 지꺼리야!" 같은,
자동차 접촉 사고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주제로 욕설을 퍼붓는 것보다
서둘러 해야 할 도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들이야 시간에 쫓겨 안달을 하든 말든
내 차와, 내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하고, 내 손해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서로 혈안이 되어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사고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지 못한다.
보행자가 되는 반면에 운전자이기도하고
피해자이기도 했다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딸이면서 며느리이기도하고, 아들이면서 사위이기도 하다.
친정엄마이면서 시어머니이기도 하다.
나이많은 사람앞에서는 동생이 되고
나이가 적은 사람앞에서는 윗사람이 된다.

계속해서 돌고 도는 인생의 수레바퀴안에서
사람들은 몇가지의 역할을 동시에 맡고 그 일을 수행하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입장이 바뀔때마다 사고는 자기 중심적이 되고만다는 것이다.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주위를 재고
불만을 갖거나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상황들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해'를 보며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해가 동쪽하늘에서 떴다가 서쪽하늘로 진다고 말하며
그 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슴을 열고 해를 보라!

해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이다.
움직이는 것은 우리가 바글거리며 아둥바둥 살고있는 지구다.
해는 제 자리에서 가만히 있을 뿐이고
지구가 매일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하며 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가 떴다가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해를 돌아간 것이 정답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구에 사는 보통사람 어느 누구도
지구가 이제 반바퀴 돌아 한낮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지구가 나머지 반 바퀴를 돌아 밤이 되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모두들 과학적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임에도
우리는 지구를 중심으로 삼고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내 자신이 속해있는 지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란 말인가.
해의 입장으로 역지사지 해보면
'내가 언제 뜨고 진단 말인가! 나는 그저 제 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인데...
지구 저 자신이 돌고 있으면서 날 더러 뜨라 마라하고,
뜨고 진다하니, 답답하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 아니겠는가....."

해가 반짝 나왔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해는 그저 가만히 제 할일을 하고 있었고
구름이, 단지 구름이 해를 가렸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대개 햇살이 비치지 않는다고 해를 향해 불평을 하지
두텁게 가리고 있던 구름을 탓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을 것 같다.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너희 지구란 말야.
나는 돌아 본 적이 없어! 너희들이 돌고 있으면서
왜 나한테 떴다 진다고 하고, 해야 떠라 떠라! 노래를 부르느냔 말야!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이기적이구나!
그건 정말 자기 중심적인 잘못된 관념이란 말이다! "

문득 나는 해가 가엾다는 생각에 빠졌다.
인류가 형성되어 지구에 살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오해를 받아온 해.......

역지사지 해보자.
우리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조금의 오해에도 부르르 떨고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얼마나 지독하게 살고있는지.....
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있는지.....

그리고 생각해보자.
스스로 돌고 있는 지구 위,
좁은 땅을 밟고 바글거리며 아둥바둥 지독하고 처절하게
여유나 배려 너그러움을 잃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