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2월 13일. 너무 어렵다

목향 2009. 4. 12. 14:35

제목 : 2003. 12월 13일. 너무 어렵다

방송이나 공연을 위해 오가는 길에
예전부터 좋아하던 팝이나 샹송들을 듣는다.

어떻게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까....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너무 부족해.....
나는 너무나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제대로 잘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라는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훌륭한 곡을 작곡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게다가 그런 곡을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너무 어렵다.

이렇게 아름답고 의미있는 가사를 쓰기는 어렵다.
이렇게 노래 부르기는 정말 어렵다.

이렇게 훌륭한 연주자를 만나기도 어렵다.
이렇게 믹싱 작업을 잘하는 엔지니어를 찾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렇게 편곡하고 매스터링을 하는 아티스트를 만나는 일도 어렵다.
이렇게 멋진 음반을 만들 디렉터를 만나기는 엄청 어렵다.

홍보와 마케팅 전문가를 찾는 것도 어렵다.
음반을 판매할 시장을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또 막상 모두를 찾았다해도
아티스트 각각의 인성과 감성과 개성이 강해
분명히 마찰이 있을 수 있고 그 분쟁을 조절하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다.

내가 듣고 있는 음악들....
이미 이 음악들은 30년 또는 40년 전에 만들어졌고
20년전쯤 전에 만들어진 곡들이 대부분이다.

외국에선 이미 1960년대, 70-80년대에 이렇게 훌륭한 곡들을 만들어냈는데
우리는 아직 그때의 음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녹음과 믹싱 매스터링을 할 엔지니어의 전문성이
너무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기가 팍 죽었다.

난잡하게 찍어내는 미디 사운드에 이미 질렸고
컴퓨터로 만들어 낸 가공의 소리에 길들여져 버린
현대인들의 감각때문에도 기가 죽었다.

사람들이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할텐데.....
진짜 악기 소리를 알아듣고 좋아해야 할텐데.....

미디 음악, 컴퓨터를 주된 음악시장에서 밀어내기란 너무 어렵다.
진짜 악기 소리에 귀기울이도록 하기엔 너무 어렵다.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어렵다.

세상을 바꾸기란 환장하도록 어렵다.

결국 나는 그 모든 생각을 접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가장 단순한 일이었다.

그렇다해서 내 꿈을 놓아버린 것은 아니다.
느리겠지만....
컴퓨터 사운드를 완전히 배제한 자연스런 음악을 할 것이라는 것
언더그라운드로 남을 것이라는 것
그 꿈이 언젠가는......
실현될 날이 오겠지.... 라며 위안하고
현실의 씁쓸함을 달랠 밖에 달리 길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런 꿈도 기억도 없는 것이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바르게 살기위한 기본과 원칙, 진실을 지키고
꿈을 꾸며 살아가는 일은 너무 어렵다.......

나는 너무나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일은 진정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