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3. 12월 19일. 눈물나게 그리운.

목향 2009. 4. 12. 14:37
제목 : 2003. 12월 19일. 눈물나게 그리운.

방송국으로 가는 길은, 퇴근시간대도 되지 않았는데
명절 귀경길처럼 자동차들이 밀려있었다.
도로 교통상황을 알리는 전광판에는 시속 7Km 라고 쓰여있었다.
차라리 걷는 것이 더 빨랐다.

밀리는 자동차안에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걸까........
한 해의 끝자락에 매달려 나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을까......
내가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버려야 할 것.
바로 이 대목에서 나의 생각은 방향을 전환했다.

이미 버려진 것.
그리하여 너무도 그리운 것들이 내 감정을 울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자의적으로 버린 것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 의해 버려진 내 소중한 추억의 물건들은
가슴을 아리게했다.

5살때부터 들어오던 LP 판들.....
오빠들이 귀하게 구해놓은 샹송 원판들과
팝송 원판들, 귀한 연주음악들,...
그 LP 들은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언제나 내 곁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고
언제나 전축위에서 뱅글뱅글 돌며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었다.
집에 도둑이 들어 내 전축을 훔쳐가기 전까지는.....

서울로 진학을 하며
나는 내 짐들을 간소화 시켜야했고
그 소중한 LP 판들은 안전한 고향집에 잘 모셔(?)두었다.

그 사이 시골집은 개축을 하게되며
어린시절 내게 그리도 들들 볶였던,
다리가 달리고 자줏빛 융단에 노란색 꽈배기 술을
테로 두르고 있는 덮개가 있던, 전축도 버려졌다는 것이었다.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간 나는
뒤통수를 쇠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었다.
"엄마! 내 판들 어디갔어?"
"응, 그거~ 강건너 **네 집 아들이 달라고해서 줬다"

엄마는 모른다....
엄마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것들이 내게 어느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인지를.
엄마에게는 네모나게 생겼고 꼬부랑 글씨가 쓰여있으며
하등 쓸모없는 무거운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하긴 엄마는 일제치하에 태어나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외할아버지의 남존여비사상에 희생되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이셨다.
어릴적부터 우리 남매들이 타 온, 무수한 상장들의
글씨도 읽지 못하셨다.
내가 받아온 상장들도 엄마에게는 내용이 뭔지 모를 글씨가 쓰여있는
휴지조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들도 모두 엄마손에 버려졌다.
내가 그려댔던 많은 그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추억들이, 과정들이, 흔적들이 버려졌다.
그렇다해서 엄마를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모르시니까....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시니까.......

엄마는 '암'이 어떤 병인지도 잘 모르시고
지금도 내가 어떤 모양새로 장루장애인이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신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알고 믿으며 천진하게 사시는 엄마가
오히려 부럽기도 했었다.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하고 말이다.

버려진 나의 흔적들  다른 것은 미련을 떨칠 수 있지만
한가지만은, 오직 한가지만은,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한다.
지금은 구할래야 구할 수도 없는 그 시절의 원판, LP 들 말이다.

만약... 만약에 말이다.
그때 그 음반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울컥 하고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 것 같았다.

사진따위는 내 어린시절을 다 말해줄 수 없는 것이다.
내 어린시절이 LP의 줄모양에 나이테처럼 박혀있는 그때의 그 원판 음반들...
눈물나도록 그리운 것들이었다.

밀리는 자동차안에서
그리움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걸 막으려
애써 눈을 깜박거려야 했다.
그래도 엄마를 잃는 것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것들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