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여행

제주여행 (3) 빛의 벙커 (고흐 * 고갱)

목향 2020. 9. 13. 15:00

(빛의 벙커 / 반 고흐 , 폴 고갱)

프랑스 몰입형 미디어아트

    

* 사진 설명 : 상좌 :반 고흐 ,하우 : 폴 고갱

<빛의 벙커 반 고흐전 >

 

*전시장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

매일 10:00~18:00 (10~5) / 매일 10:00~19:00 (6~9)

 

전시장에 들어서며 깜짝 놀랐다. 그냥 벽에 걸린 그림들을 약 40여분 둘러보나 했는데 그 드넓은 벽면을 꽉 채운 빛의 향연이 영화 스크린처럼 웅장한 음악과 함께 돌아가는데 처음엔 어리둥절 했다.

수십 개의 프로젝터와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얼마나 규모있게 설치했는지 그냥 황홀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폴 고갱의 '섬의 부름' 작품 새롭게 재해석 된 새로운 느낌이 다 .관람객모두가 바닥에 털썩 앉아 작품을 감상하기에 우리도 가장 중심자리에 편히 앉아 감상했다. 아마도 이번 제주 여행중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 반 . 고흐 그림>

* 까마귀 나는 밀밭

*빛의 벙커는

국가기간 통신시설로 사용되던 공간을 몰입형 미디어 예술 전시관으로 재탄생시킨 곳으로

수십 대의 프로젝터와 스피커로 특별하게 재구성하였다.

반 고흐의 강렬한 삶의 여정, 30, 폴 고갱의 작품은 약10분 정도 상영된 듯하다.

작품과 내가 하나 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로 작품과 음악에 몰입되었다. 흘러나오는 웅장한 음악도 귀에 익은 곡들이 많아 흥얼 거리기도 ....

* 꽃피는 아몬드나무

 

 

*해바라기

해바라기"로 유명한 고흐, 겹치는 작품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들이 이어졌고 그중에는

낯익은 작품도 꽤 있기에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 고흐의 일생 >

1853330, 가난한 네덜란드 시골의 개신교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외향적인 안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투스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안나는 1년 전 같은 날 빈센트 윌렘이라고 이름지어 준 아기를 사산했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도 똑같이 그대로 지었다고 한다.

 

1872년부터 아우인 테오가 화랑에서 함께 일하게 되자 빈센트 는 몹시 행복했고

그해 8월 학교를 다니다가 일시 귀향한 테오에게 보낸 짧은 편지를 쓴 것이 그 후 그들 사이에서

평생을 두고 오간 편지의 시작이었습니다.

37년이라는 생애 동안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늘 고독했던 고흐는 그의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와 18728월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 관람현장 영상

 

<태호에게 쓴편지 중 테오에게 >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고흐 살아 생전 작품 1점이 팔렸다하니 그 가난은 미루어 짐작 할 수있다.

 

< 폴 .고갱그림>

*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고갱은 고흐의 <해바라기> 심장을 멎게 했다고 한다. 고로 해바라기를 그리는 장면을 직접 그리기도 했다.

 

미술사에서 전해오는 수많은 뒷 담화가운데 고흐와 고갱에 관한 이야기만큼 귀를 쫑긋 세우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실은 동성애 관계였다는 얘기에서부터 고흐의 귀를 자른 것은 고흐 자신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주장까지 두 사람에 얽힌 소문은 거대한 산을 이룬다고....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는  자살 소동이 있은 뒤 전에 없이 창작에 강한 집념을 불태웠다.

그는 죽기 전에 반드시 위대한 작품을 그리겠다는 결심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꼬박 한 달을 작업에만 매달렸다. 그는 어느 날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캔버스를 마주하자 그의 눈앞에는 간밤의 꿈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라는 철학적인 명제가 이 그림의 제목이 되었다.

 

원시미를 찾아 두 번째로 타히티를 방문한 고갱은 고갱은 타히티의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다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지만 각종 질병과 우울증, 그리고 개인사적 불행으로 인해 참혹한 나날을 보낸다.

 

자신의 유언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통해 고갱은 그가 가지고 있던 예술적 주제의식과 색채 및 구상기법을 총동원 작업에 임했다. 또한 그의 작품에는 타히티 여인이 등장하지만 특히 나체의 미를 표현한 작품도 꽤 있다고 ......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

 

1897,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화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은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완성한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그 당시 고갱은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한때 죄악의 도시라고 부르던 파리를 향해 자신의 예술을 인정해달라며 구걸하기도 했지만, 이 일로 세상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졌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고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독초를 먹으면서 죽은 뒤 산짐승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다면 완벽한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갱은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1903년 심장병으로 죽을때까지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폴 고갱 동영상 직찍

 

 

        

                         *  바로 아래 동영상은 인터넷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