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연스님>
<법연스님과의 대화>
월악산 오두막의 동생네 집에서 밭둑길을 따라 약 150m쯤 돌아들면 <중생사> 라는 아주 작은 암자가 있다. 바로 이 암자의 스님과 합장으로 수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안내를 받아 차, 한잔 들면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스님도 고독한가? 하기야 스님도 사람인데 고독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아침산책길에 그 스님이 기거하는 집 앞을 지나게 되면서 말을 트게되었다. 바로 전날 밤에 눈이 조금 내려서 내 발자국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을 것이고 마침 그때 스님이 , 창문을 열면서 하는 말,
“눈도 내려 길이 미끄러우니 차나 한잔 하시죠?”
하는 게 아닌가. 초면인데……. 조금은 의아해 했지만, 나 역시 길이 미끄러워 망설이다 나선 길이라 그냥 반갑게 따라들어 갔다. 이곳은 너무 적막하고 더구나 겨울철이라 사람이 뜸한 곳이니, 아무리 스님이라해도 혼자의 생활이 많이 적적하기도 했을 법하다.
어떤 보살이 기거하다 떠나고 절이 비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바로 이 스님이 새로 오신 모양이었다.
이것도 인연인가, 스님과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스님은 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끌어갔다. 스님 왈, 보통 말문을 잘 열지 않는데 한번 열었다 하면 그냥 쏟아낸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어떤 불교적 법문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온 인생여정, 칠십년 가깝게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고백서 같은 것이었다. 스님이라기보다는 그냥 보통 알고 지내는 지인에게 듣는 듯 전혀 부담이 없고 너무도 기구한 인생행로이기에 약간의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잠시 스치는 생각, 아니 초면에 어떻게 저렇듯 알몸을 다 내 보일 수 있을까? 간간히 의구심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론 스님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약 3시간 넘게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아침식사 때문에 동생이 나를 찾을 것 같아 결국은 내가 먼저 일어서야했다. 돌아오며 내린 결론 ‘역시 스님은 스님이구나.’ 란 것이다. 속세의 보통사람이라면 절대 그렇게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감추고 덮고 숨기고 속은 뻔히 들어 나는 대도 포장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던가?
이야기의 줄거리는 태어난 가문, 학력, 국가선수입문, 직장, 결혼, 이혼, 자식, 산속의 도인생활, 종교, 세 번의 자실미수, 현재 이 암자를 찾기까지의 모든 것을 아주 상세히 말씀 하시는 거였다. 왜 그래야 했는지 그 원인에 얽힌 이야기 까지 다 쏟아냈지만, 차마 여기서는 그 스님에 대한 예의로 이쯤 해 두기로 한다.
기독교 집안의 태생이라 20년간이나 기독교의 교리를 배우며 신앙심을 키웠는데 이렇게 개종이 되었으니 모든 것은 인연의 고리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덕스럽게 보였으며 퍽 씩씩한 인상을 주었다.
정식 부처님 말씀의 법문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또 다른 법문일 수도 있었다. 만법이 불법이라 하지 않던가.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이라고 힘준다. 예를 든다면 효도하는 자식을 낳은 부모는 전생에 베푼 삶을 살았기에 그런 자식이 태어나는 것이고 자식에 의하여 목숨을 잃는 자는 그 또한 전생의 삶이 가져다 준 업보라고 했다. 인과응보란 말로 귀결이 지어진 것 같았다.
헤어지며 던지는 말, 죽어 등신불이요, 살아생전 관세음이 란 말을 남기며 또한 이렇게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일도 전생의 인연이라고 …….
아무튼 나에겐 귀중한 시간이었다.
<김교각 = 등신불>
중국의 기록에는 신라의 왕자란 기록만 있을 뿐, 신라 어느 왕의 자손이라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비경관의 기록에 있는 출생 연대로 유추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조해 볼 때, 김교각 스님은 서기 697년 신라 제 32대 효소왕 4년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난 김중경(重慶)으로 파악된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제33대 성덕왕이 된 신문왕의 둘째아들 흥광대군 효명이다.
701년 김중경의 나이 4세 때 32대 효소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던 심목태후가 암살되고, 몇 년 후 효소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흥광대군 효명이 왕위에 오르니 33대 성덕왕이다.
이후 김중경의 화랑이 되었을 때 친모 성정왕후와 성덕왕 사이에 후궁문제로 갈등이 일어나 세속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719년 당 고종 영회4년(653년) 24세의 나이로 신라를 떠나 당나라 건너가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이후 구화산에 자리를 잡고, 구도 활동을 하다가, 구화산에서 75년을 수련하여 99세에 열반에 들었다. 794년 제자들을 모아놓고 고별인사를 한 뒤 입적을 하였는데, 자신의 시신을 석함에 넣고 3년 후에도 썩지 않으면 등신불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스님이 열반에 든 후 산이 울면서 허물어 졌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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