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세월의 강

목향 2009. 5. 19. 15:25

 

세월의 강

 

눈발이 풀풀 흩날리는 날,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왔다.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헤어진 후 20여년만의 재회다. 서로 따뜻하게 손을 맞잡고 반가와 해야 할 만남, 아니 밤을 새우며 긴긴 말을 했어야 할 만남이 치례적인 인사로 끝났다.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묻지 않았고 언제 또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졌다. 나의 달갑지 않은 태도 때문인지 그 또한 별 말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왔다간 사실만으로도 나의 가슴엔 파문이 일었고 그와의 빛바랜 기억들이 생기를 찾은 듯 밀물처럼 밀려 와 흔들어 놓는다. 이제 사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주 까맣게 잊혀진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를 완전히 잊기 위한 한 방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오래전이다. 그때 나는 첫 발령을 받은 단발머리 초년병으로 모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직후여서 엄청난 슬픔을 감당하기 힘 든 때였다. 그때 나의 학교로 발령 받아온 친구가 바로 그였다. 같은 나이의 미혼인데다 한 직장에서 일하게 되니 자연스레 통하게 되고 친해지면서 늘 상, 실 바늘처럼 어울렸다.

내가 소심하여 잘 따지는 성격이고 치밀한 편인데 반해 그는 화려하고 낙천적이며 여유로웠다. 하지만 서로의 상반된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갔다. 특히 그는 인정이 많아 언니처럼 나를 감싸주었다. 때론 여행을 하면서 낭만과 사색을 즐겼고 젊음의 고뇌도  같이 풀었다. 감명 깊은 영화나 문학작품을 놓고 어설프게 열띤 토론을 벌리기도 했고 때론  의견이 맞지 않아 삐치기도 했지만, 어려움을 나누면 반으로 줄고 기쁨을 나누면 배로 는다는 말처럼 그렇게 지냈다.

인생은 곧 만남이라고 하는데 그와 나의 만남 역시 소중한 것이었다. 숱하게 스쳐가는 인연들 중에 마음의 교류가 이어져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면 생의 여정에서 얼마나 값진 일인가. 그렇게 지나는 사이 시간은 흘렀고 2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그는 사교적이고 미모이기에 주위에서 치근대는 사람도 꽤있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한 남자가 나타나 연애를 하게 되었다. 헌칠한 키, 번듯한 얼굴 외모는 준수했지만, 아무튼 주변에선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사랑을 하게 되면 콩 까풀이 눈에 끼인다.”

 

 

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 된 셈이다. 결국 그는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후 얼마동안은 무척 행복해 하는 것 같더니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우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고 미주알고주알 얘기도 많던 그가 차차 말 수가 줄어들면서 무엇인가 숨기는 듯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 무렵 나는 뭔가 불미한 일이 있는 줄은 짐작했지만, 직접 얘기해 주지 않으니 묻기도 주저할 수밖에 …….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담임 반 아이가 와서 내 도장을 빌려 오란다. 그때는 아주 중요한 장부가 아닌 서류엔 본인 대신 다른 사람이 도장을 찍어주는 일도 흔했다. 또한 그를 믿고 있기에 어디에 쓰이느냐는 반문도 없이 선 듯 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 후쯤 되었을까, 낯선 음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 간밤에 그 친구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도주를 했고 채무보증서에 내 도장이 찍혔으니 갚아야 된다는 요지의 설명에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설을 막 퍼붓는 것이다.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 그의 집을 방문해 보니 썰렁한 빈집,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의 부모나 형제들은 나를 찾아와 그가 간 곳을 알려 달란다. 청천벽력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정말 기가 막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서글펐다. 그의 인간성에 실망했고 배신감에 떨었다. 얄팍한 내 봉급 봉투가 더욱 가벼워 진 것도 나에겐 큰 타격이었다. 동생들의 학비조달로 가정교사까지 하고 있는 내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도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를 그 어떤 구실로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로인해 나는 몇 날인지도 모를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이후 세월은 참 많이 흘렀다. 떠난 후 수년간은 바람결에라도 그의 소식을 듣고 싶어 했지만, 세월은 참 망각의 묘약이었다. 분노도 미움도 사랑도 식어버린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 예고도 없이 불 쑥 나타났으니 무슨 말을 어디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마음속에 묻어둔 채 한마디의 언약도 없이 헤어졌다.


왜? 그토록 경직되어 서먹하게 서있어야 했을까? 참 인간의 심사는 풀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동물이다. 그러나 그가 다녀가고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 했다. 어떠한 명목으로도 파렴치한 그 행동을 용서할 수없다고, 아니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를 이해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 한 것이다. 마음속의 걸림 돌을 지닌 채 살 수없다는 깨달음 이었다. 마음속의 찌꺼기를 씻어 내리는 일은 바로 나의 마음을 편하게 다스리는 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왜? 이토록 긴 세월의 강이 흐른 뒤에야 깨우치게 되다니 후회의 거센 강물이 가슴을 때린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결과만을 놓고 평가했지 그렇게 엄청난 일을 벌 릴 수밖에 없었던 동기나 과정은 깊게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모두는 욕설을 퍼 부어도 적어도 너만은 나를 이해해 주겠지 한 는 기대가 그에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 된 우정이란 어려울 때 돕고 의지함이 아닌가. 역지사지란 말을 자꾸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이고 값있는 인생은 자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 아닌가. 행복은 서로가 참 마음을 주고받을 때 있지 않을까, 관계의 균형과 조화가 잘 이루어 질 때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그는 가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자기는 양손에 인연의 끄나풀을 한 개씩 쥐고 있는데 하나는  남편이고 또 하나는 너라고 …….

그래 이제, 언제라도 만나게 되면 네가 내게 한마디의 언질도 없이 떠난 것이 나를 이용한 얄팍한 계산이 아니고 내가 인생을 좀더 깨달은 계기로 삼았다고 이야기 해 주고 싶다. 풋풋한 시절 순수하게 보냈던 그 시절의 시작이 좋았던 만큼 끝마감도 좋게 마무리 하고 싶은 거다.


시간을 내어서 그의 주소를 수소문 해봐야겠다.

 

“그래. 이제 편안하게 만나자, 너 어디에 사니?”

 

 

 

 

위 사진은 직직 한 것으로 충주호입니다. 뒤로 보이는 뒷 산은 월악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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