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가을 인생

목향 2009. 3. 6. 16:38

 

 

가을 인생

 

축 처진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그날따라 의외로 일찍 들어온 애들 아빠 왈,

“왜 그리 죽을 꼴이야.”

반 조크 식으로 한 마디 던진다. 그 말에 얼른 나온 대답.

“이제 가을 인생이니까.” 하고 불쑥 말을 받았다.

환갑을 지난지도 벌써 오래이니 그 대답은 어쩌면 실제보다 더 후하게 준 채점표 일 수도 있는데 왜 이리 섭섭한지. 새삼스레 서운할 것도 사실은 없는데 그렇게 대답을 해놓고도 그냥 허전하다.

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고 여자들 평균 수명이 80을 넘는다고 호들갑이지만 명료하지 못한 정신력, 여기저기 아픈 몸으로 수명만 길면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건가. 흔히 가을이란 말에서 닿는 느낌은 풍요로운 수확, 맑은 하늘, 서늘한 공기, 타는 듯한 단풍을 꼽기도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의 가을은 오곡백과를 다 거두어들인 황량한 들판, 낙엽 진 앙상한 나뭇가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지천에 깔린 억새, 그저 쓸쓸한 늦가을이다.


이제 이렇듯 허허로운 들판에서 뒤돌아보니, 후회와 아쉬움과 회한이 온 몸을 휘 감는다.파릇파릇 연초록의 잎이 경이롭게 피어나는 그 희망찬 봄철, 검푸른 잎 새 들이 쑥쑥 자라나는 그 혈기왕성한 여름날에 나는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그래도 세상 고민은 혼자 짊어진 냥, 나름대로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 낸 것 같은데 지금에 와 헤아려보니, 지위도 지식도 명예도 금전도 집어넣을 것이 없는 텅 빈 가방으로 덩그마니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금전이야 빈손이긴 하지만 아예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아이들 공부시킬 정도로 생각했었으니 둘이 일한 대가로 이나마 크게 궁색하지 않게 지내게 되니 그런 면에선 큰 아쉬움은 없지만 그냥 이대로 가기엔 무언가 미진함으로 개운치 않다.


“짐승은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는 말도 있는데…….


그러기에 때론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선 듯 한 외로움과 며칠을 자고나도 풀릴 것 같지 않는 고뇌가 엄습하면 내 자신을 감내하기 어려워 때론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 서산에 걸려있는 황홀한 무지개를 잡겠다고 뛰지 말자. 살아 갈 날은 많지 않았다. 과욕은 금물이며 늘 감사하고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의 일원으로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건강에 유의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다 어느 날 하느님이 부르시면 미련 없이 ‘네.’ 대답할 수 있도록 하자.


이렇게 내밀한 언어들로 평범하지만, 소중한 답으로 자신을 다독이기도 한다.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세상을 뜨시기 며칠 전, 나는 면으로 된 푹신 할 것 같은 잠옷을 준비해 아버지 댁으로 갔었다. 목욕을 시키고 잠옷을 입히는데 그 피골이 상접한 몰골을 보니 그만 울컥 눈물이 솟구쳐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했었다. 그때 내손을 잡으시고 하신 말,


“얘야. 너무 슬퍼 마라. 인생 왔으면 가는 거 정 한 이치야. 그런데 왜 이리 허무한지, 너의 어머니 일찍 세상 뜨고 참 고생이 많았다. 그저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니 편하게 살아라. 아이들 잘 돌보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접고 차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신듯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 하시는 아버지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지금 내 나이가 딱 아버지 운명 하실 때의 나이다. 내일 어떨지 아무도 모르지만 아마도  내가 아버지보다는 수명이 더 긴 것 같은데 나는 요즘 아버지 말씀 중, ‘얘, 왜 이리 허무 하냐.’ 란 말을 자주 되씹는다. 지나고 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 란 말씀 아닌가!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아버지의 말씀과 내가 지금 생각하는 허무의 무게는 감히 저울질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 후일 누군가 내 자식들에게 너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우리엄마는 , 꽃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지녔고 모든 세상사를 흑은 흑으로 백은 백으로 바로 보았으며 그 무엇보다 욕심내지 않고 거짓 없는 정직한 삶을 살았다고 그리고 초롱 한 눈빛의 동심을 흐리지 않게 양심껏 가르치는 일에 노력했다고…….

이렇게 내 자식들이 대답할 수 있게 하리라. 이 허허로운 인생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남은 시간을 위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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