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산사를 찾아서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 하던 날, 남편은 다소 들뜬 마음으로 말을 건넸다.
“내가 운전이 좀더 능숙해지면 당신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안내하리다. 어디를 제일먼저 가보고 싶은지?”
이 말을 들은 나는 마치 대답을 준비해 두었던 것처럼 우선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땅이고 다음은 내가 몸담아 근무했던 직장과 그 고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을 받았다. 직장생활의 이모저모는 곧 내 삶의 흔적이며 그 고장을 다시 찾아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고, 고향 또한 항상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리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혹여 그리운 얼굴을 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가울 것이며 새로운 풍물이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그 약속은 잡다한 일상에 밀리고 또한 미숙한 운전 때문에 망설이다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늘이 더없이 맑고 햇빛도 밝았다. 처음 새 차를 구입해서 나들이 길에 오르니 기분도 날씨처럼 밝았다. 목적지는 고향땅 ‘고산사’ 란 절을 찾는 거였다. 고산사, 나의어린시절 어머니께서 두 손이 닳도록 무릎이 시리도록 합장 배 하던 곳이다. 어머니께서는 부자 집 종가의 장남 이셨던 아버지께 시집와서 딸만 내리 다섯이나 두게 되니 아들 두기가 소원이셨다. 그 소원을 불심으로 이루기 위해 이 절을 찾았던것이다. 나는 그 어린나이에도 칠거지악 (七去之惡 )이란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참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딸을 낳는 일이 여자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 당시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아버지의 시앗까지 들여야 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일심으로 부처님을 모신 덕분일까, 결국 어머니께선 끝으로 아들 둘을 두셨으니 이 절은 어머님의 소원성취의 장이며 요소요소 어머님의 숨결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하다.
고향 떠나 20여년,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뀔 적잖은 세월이 흘렀으니 고향 가는 길도(국도36번) 참 많이도 변했다. 하기야 지도를 바꿔놓은 거대한 인공 충주호가 들어섰으니 살미 삼거리를 지나서는 완전히 바꿔진 신도로로 들어서야했다. 작은 산모롱이를 돌아드니 그 거대하고 시원한 충주호가 내 닿는다. 신문지상으로 이미 상상은 했지만 이렇듯 변화된 모습에서 그저 격세지감이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결 따라 마음도 일렁인다. 월악산 나루터를 지나면서 한발 더 가까워지니 갖가지의 추억들이 하나하나 새롭게 나타나면서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 가까스로 참았다. 어린시절 다래끼 옆에 끼고 다슬기 잡던 그 큰 냇가, 커다란 바위 돌 사이사이를 물거품 내뿜으며 돌아가던 여울물, 옛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보니 어떻게 변했으며 어떻게 살고들 있을까, 보고파진다.
이쯤 될 것이란 가늠으로 도로 옆에 차를 세웠다. 이정표가 있을듯해서 여기저기 살피니 아주 작은 표찰이 산사를 안내한다. 산 경사는 많이 가파르고 길인지 숲인지 가늠하기 어려워 한참씩이나 머뭇거리며 힘겹게 오른다. 혹시 절이 폐쇄 된 것이 아닐까, 사람의 발길이 이렇게 뜸하다니 연신 숨을 몰아쉬고 이마의 땀을 씻으면서 언젠가 어머니와 쉬어가던 그 산 찔레꽃 나무 그늘 을 찾느라 서성이기도 했지만 보이지 않아 서운하기도 하다.
오래전 일꾼 등에 한 짐 지키고 그 뒤를 힘겹게 오르던 단아한 어머님의 모습과 초등학교시절의 내 모습도 그려지고 ......
몇 번인가 산허리를 돌아드니 멀리 요사체가 보인다. 얼핏 보아도 바로 옛집 그대로 인듯하고, 먼발치나마 댓돌위의 하얀 고무신이 보여 무척 반갑다. 절이 폐쇄 되지 않고 어느 스님이 계시다는 증거이니 더욱 걸음이 빨라진다. 나는 조심스럽게 요사 채 방문 앞에 섰다. 혹시 오수라도 즐기시면 어쩌나 하고 한참을 망설이다 스님을 불렀지만 인기척이 없다. 몹시 서운했다. 아마도 어디론가 출타중인가 보았다. 뒷산 쪽에서 컹컹 꿩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그저 적막강산이다. 뜰 옆 옹달샘의 냉수 한 컵 마시고 대웅전으로 향한다. 지나는 길에 작은 연못으로 눈이 갔는데 언젠 가처럼 올챙이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춘다. 그 옆에 초라하게 서있는 안내판 이 삐딱이 서서 나그네를 맞는다.
신라 말 도선 국사의 창건이라고 쓰여 있다. 연대를 따져 헤아려보니 그렇게도 어머니께서 지극정성으로 법당을 찾아 들던 때는 ‘호암’ 스님이 주지승으로 계실 때였다. 키는 작았지만 온화한 스님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난다. 법당 (응진각, 나한상이 봉안됨) 앞문은 커다란 자물쇠가 딱 걸려있고 옆문엔 철사로 고리를 칭칭 감아 놓았다. 고리를 풀고 들어가 어머니께서 그토록 지성을 다해 합장 배 하던 그 자리에 서서 3배를 올렸다. 옛날의 거룩하고 단아한 그 모습, 웃음 띤 얼굴 로 내려다보신다.
왜 이제야 왔느냐? 나무라실 것만 같았다.
아직 나는 종교 선택을 못하고 있다. 여기저기 조금씩 양념정도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세속의 이기심 때문인지 아니면 게을러서인지 급할 것 없는 양 자꾸 미룬다. 그러나 부처님을 대하면 그냥 돌아서지 못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3배라도 드리는걸 보면 아마도 어머니의 지극한 불심의 영향이 아닌가한다.
불교는 내가 누구 인가를 깨닫는 종교며 그 깨달음으로 성불 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불생불명’ 말 그대로 난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오직 나인체로 윤회 속에 묻혀 산다면 정말 오늘을 잘 살아야 될 터 인데 모르겠다. 행복과 불행이 세속적 권위나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님은 확실한데 어쩌다 이를 잊고 허둥댈 때도 있다.
법당 앞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 장엄한 월악산이 좀더 가까이 다가 앉는다. 영봉에 눈이 가니 한 친구가 떠오른다. 서로가 햇병아리 선생일 때 그 영봉에 같이 오른 적이 있다. 지금은 길이 잘 나 있어 웬만하면 쉽게 오르는가본데 그때는 내 키 보다 훨씬 큰 수풀을 뚫고 기다 시피해서 정말 힘들고 어렵게 올랐었다. 지금 그 친구가 어디 사는지조차 모르지만 한때 가장 따뜻한 친구로 의지했었는데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월악산 산기슭에 구름이도니 신륵사 이 마을에 비가내리네.
서울 간 임에게는 소식이 없고 아, 어찌하란 말인가요.”
이 노래는 내 유년친구 옥이아버지가 지었다고 했고 동네 사랑방 같은데서 마치 애향가 인양 불려지곤 했는데 그 어린 시절의 듣던 가사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니 세삼 신기했다. 이 노래를 지은 옥이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도 벌써 저세상 간지 오래다. 이곳저곳 휘둘러본다. 그러나 이 산사는 아마도 휴식에 들어간 모양이다, 주변 모든 게 사람 손이 닿은 지 오래 인듯하다. 잡풀과 뒤엉긴 꽃들이 예쁜 모습으로 손짓 하지만, 참 아쉬움이 남는다. 도회의 절엔 신도들이 넘쳐나나 본데,
산사의 해는 짧았다. 아까부터 남편은 밤이면 운전어렵다고 재촉 인다. 산을 내려온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에게 더없이 살라한다.
욕심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어느 스님의 시구가 마음으로 전해진다.
따뜻한 고향의 내음과 어머니의 숨결을 거듭 내 가슴의 사진첩에 끼운 소중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