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여행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서

목향 2009. 5. 19. 17:00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위 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 의 첫 연이다.

문학기행 일정중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을 돌아 보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이육사의 문학관>이다.  이 문학관  강당에서 세미나를 열어 충북대 전 교수인 <김홍은> 님의 강연, 이육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님>의 아버지에 대한 옛 이야기, 회원의 작품 낭송도 있었다.

이육사 문학관은 안동시가 이육사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육사문학관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2004년 7월에 건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과 관련,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아 육사 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그의 출생지인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1층에는 선생의 흉상과 육필 원고, 독립운동 자료, 시집,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조선혁명군사학교 훈련과 베이징 감옥 생활 모습 등도 재현해 놓았다.  

 

 

 

 

 

 

 

 

                                                                       * 정가일 시인의 시 낭독 모습

 

                                                           

                              *  이육사선생의 혈육  옥비님과  한 컷  < 가운데 한복 차림이 옥비 님  >  우측: 수필가 김혜식 님

 

 

                                                                   

 

                                                                     * 이육사 문학관에서 바라본 전경

 

                                                                    < 이옥비 여사의 이야기>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1904∼44, 본명 이원록)의 유일한 혈육 이옥비(67) 여사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문학관’의 안주인이 됐다. 이씨는 안동시의 권유로  문학관에서 일본어 통역 등을 하다가 아예 문학관 뒤쪽에 복원된 시인의 생가인 육우당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육우당은 앞뒤 두 채의 한옥으로, 뒤채는 이 여사가 기거하고 앞채는 문학관의 사무국 공간으로 쓰고 있다. 안동시는 육사 탄생 100주년인 2004년 문학관을 개관해 직영해 오다 이육사추모사업회에 운영권을 넘겼다. 


시인은 이 여사가 세 살 때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1944년의 일이다. 그런데도 살아생전 아버지의 옷차림은 용케 기억에 남아 있단다. 아버지가 아이보리색 옷을 입은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생전에 “맞다”라며 “그게 기억나느냐”라고 놀라워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통해 들은 아버지는 멋쟁이였다고 한다. 바지의 주름이 빳빳하게 서도록 항상 요 밑에 바지를 깔았고 흰 칼러는 하나씩 여유분을 갖고 다녔단다.

이 여사는 본래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모두 첫 돌 전에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셋째가 옥비(沃非)씨다. ‘욕심이 없어라’ 란 뜻의 이 이름은 백일 날 아버지가 직접 지어 주셨단다. 간디처럼 욕심 없이 살라는 뜻을 담았단다. 아버지가 딸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인 셈이다.

 

 “당시 감옥에서 제 아버님의 시신을 수습한 이병희(92) 선생을 만나 그 당시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님은 눈을 감지 못 한 채 숨을 거두셨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 이제 조선은 저희에게 맡기시라’ 라고 말하며 눈을 감겨 드리자 아버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고 해요. 그만큼 삶이 고단하셨는가 봅니다.”


이 여사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어머니와 가족들 품에서 “아버지를 빼닮았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가 대학을 마치고 결혼한 뒤 주부로 살아왔다.

두 아들을 키우며 꽃꽂이와 궁중요리를 공부했고 가르치기도 했단다. 99년 평소 건강하던 남편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이 여사는 일본으로 훌쩍 떠났다. 때마침 일본 니가타의 한국 총영사관이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열흘 만에 내린 결정이었다고 모든 걸 잊고 싶어서였단다. 그래서 머문 게 5년6개월이나 됐다.

묘한 인연이었다. 대학 시절 일본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더니 뒤늦게 이를 안 어머니가 화를 내기도 했다고  그렇게 아버지가 원수처럼 싫어한 나라가 일본인데..... 그러나  너무 몰랐던 일본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글 쓰기는 마음은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피해 갔어요. 웬만큼 해서 되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두 아들도 글과는 인연이 없다고 했다. 이 여사는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아버지 시를 외워 보라고 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는 육사의 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불편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아버지가 나무꾼이라도 살아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육사문학관은 개관 이래 10만여 명이 찾았다. 학생과 문인이 많이 찾는다. 그는 요즘 문학관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많이 듣는다. 찾아오는 문인들과 이야기도 나누다 보면  가까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느낌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