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여행

불탑의 나라 미안마 (버마) 에 가다

목향 2009. 8. 6. 19:10

 

불탑의 나라 미안마 (버마) 에 가다

 

  

미안마를 다녀 온지 꽤 오래되어서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워낙 특별한 인상을 준 곳이기에 지금도 몇 가지의 각인되어 있는 형상이나 환경 경관 등이 오롯이 떠오르기에 그때의 사진을 올리면서 추억을 되살린다.

수도는 양곤이다. 말레이 반도를 따라 내려간 길이 640km의 지협까지 포함해서 남북길이는 약 2,050km이고, 폭이 가장 넓은 곳의 동서길이는 935km 정도이다. 남동쪽으로 타이·라오스, 북동쪽으로 중국,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 및 인도의 여러 주들과 경계를 이룬다.

중장년층 이상이면 대개 ‘버마’로 기억하는 나라 미안마는 우리와 닮은 근세사를 살았다. 우리가 외세에 부대끼기 시작할 즈음이던 1885년에 미안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우리가  일본 손아귀에 들어간 뒤 그 곳 또한 그 군대의 점령지가 됐다. 2차 대전 후 우리가 미군정 지배를 받을 때 그들은 다시 영국에 예속됐다. 1948년 우리가 새 나라를 출범시킬 때 그들도 독립했다. 우리가 1961년 쿠데타를 겪자 미안마 역시 이듬해에 그 길을 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안마는 우리가 넘보기 힘든 소득 높은 나라였다. 인구는 남한과 비슷한데 영토는 한반도 전체의 3배나 됐다. 우리 서민들이 쌀 밥 먹기힘들때, 이미 그나라는 아시아 최대의 쌀 수출국이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지금까지도 석유`가스`보석만 팔아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자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후 국민소득을 2만 달러 이상으로 높였지만 미안마는 지금도 200달러 수준에서 게 걸음 중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지도자의 역량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전 박정희 대통령을 떠 올리게된다. 

 

 *미안마 대표적 민주인사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군사정부에 의해 아직도 가택 연금 중이다.

 

 

* 쉐다곤 파고다  (모두가 맨 발 : 뒤에 설명)  

 

 

 * 쉐다곤 파고다

 

* 위 두사진은 쉐다곤 파고다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이 탑은  우기에 물에 잠기지 않도록 58미터의 언덕을 만든 후 그 위에 조성하였다 한다.

이 탑에는 항상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이 관광이나 참배를 위해 모인다. 특히 불교가 선풍적으로 번지는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인들이 많다.  쉐다곤 대 탑은 양곤 시내 어디에서고 볼수 있으며 그 크기나 웅장함으로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미안마에 현존하는 파고다 중 가장 위대하고 인상적인 파고다 이며, 미얀마 국민의 자존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원래의 높이는 8.2m였으나 , 미안마왕조들의 끊임없는 증축으로 현재는 100m에 이르고 있다.  

이 파고다는 표면이 모두 금으로 뒤덮여 있으며(역대 왕과 불교도들이 기증한 금판이 불탑 벽을 모두 메우고 있다)  내부는 부처의 유품이 있다.  

 

 

  *<바간>에서 제일 큰 탑앞에서 : 뒷 줄 오른족 세번 째 필자

 

 

 

*경관은< 바간> 의 석양이 백미인데 녹음 속에 금빛으로 우뚝 솟은 불탑들이 붉게 물들면, 아 !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으면 그냥 마음도 부처님의 품인 듯 평화롭기만 했다.


 

 

* 공양 줄서기  

 

 

* <만달레이>의 세계 최대의 석장경  

 

 

 * <바간>의 불탑

  

 

           * 위 사진 맨 뒷 줄, 우측 두 번째 필자 

 

 

 

 * 위 사진 뒷줄 우측 세 번째 필자

 

 

 

* 불교의 나라답게(약 90%가 불교도) 가는 곳마다 불탑이나 사찰이 많은 데 오로지 생활의 모든 것이 부처님 숭배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이 그냥 느낌으로 전해졌다.  

단 돈 몇 푼이라도 생기면 그냥 지나다가도 사찰에 들려 절하고 불전함에 넣고 가는 일이 생활화 된 듯했다.

불전함 역시 법당 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밖에 놓아두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꺼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훔쳐가는 사람이 없단다. 얼마나 정직하고 순박한가?  

 

 

 

 

  * 위 사진의  좌측이 필자 

 

 

  * 위 사진 우축 세 번째 선사람이 필자

  

   

  *  사진뒤로 펼쳐진 조망권을 바라보면서 그 전원적인 고즈넉한 분위기에 모두가 젖었다.

 

사진에서 보듯이 모두가 맨발, 특별한 경우 아니면 모두가 맨발로 생활하며 특히 사원에 들어서면 누구나 맨발로 다녀야 한다. 관광객들도 예외 없이 신발을 신지 않고 다녀야하기에 벗은 신발은 여행이 끝나고 귀국 하던 날에야 제대로  신을 수 있었다. 맨발로 다니는 감촉이 좋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 바간>의  아름다운 일몰

 

 

* 승려들의 공양 모습 :손으로 식사를 하는데 하루 두 끼를 들며 그 주변에는 날짐승도 날고, 개, 고양이 같은 짐승들도 어슬렁 거리고 다닌다. 그것은 인간과 서로 상생하는 의미며 식사후 남은 음식은 그 짐승들에게 나누어 준다.

 

 

 

 

 

 

 

 

 


  위 사진에서 보듯이 대중교통인 버스는 4톤 트럭을 개조한 듯 양쪽으로 긴 의자가 놓이고 거의 옆, 뒤 론 몇 사람 매달려 가는 게 보였지만 교통법에 걸리지 않는 듯 했다. 아니 교통법이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다.

 

우리나라 부자보다 훨씬 잘 사는 사람이 있다고는 하지만 대개 보통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의식도 누굴 원망하고 부러워하기보다는 전생의 자기 업임을 확실히 믿고 있기에 나도 현세에 잘하면 다음세대에는 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 들인단다. 

 

하의로 입은 옷은 남여모두 우리나라 꼬리치마 비슷하게 천으로 온몸을 휙 감은 듯한 모습들인데 각자 개성이나 아름다움은 찾을 수 없지만 옷 값 안 들이고 편해서 좋을 듯했다. 

 

또한 여자들은 미의 상징인듯 얼굴에 허연 가루같은 것을 발랐는데 (다나까) 나무를 갈아 만든 분말이라 한다. 

 

 

 

* 관광다니다 보면 위 사진과 같이 금 딱지를 붙이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그 일은 그들의 일과인듯 했다.

 

 

 

 

 

 

 

위 사진은 아웅산 폭파현장이다. 빨간지붕이 당시 폭파자리인데 당시건물은 철거되고 새로지은 콘크리트 구축물이다 이 현장에서니 마음이 참 우울했다 .당시의 그 참혹한 현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한 북한의 폭탄테러사건이다. 

미얀마는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서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의 첫 방문지였으며, 이날은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의 묘소에서 참배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전두환은 행사에 참가차 이동중이었고, 사건이 일어난 오전 10시 28분에는 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한 수행 공무원들과 경호원, 기자들이 미리 대기해 있다가 화(禍)를 입고 말았다.  

 

<참고>  

 

미얀마인들은 그들의 나라를「황금의 미얀마」라고 부른다. 도금된 사원의 지붕은 추수시의 들판과 잘 조화를 이루어 나라 전체를 황금색으로 만든다. 노란색 법의를 입은 스님들은 온통 황금색으로 물든 거리를 발우를 들고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걷는다.

그 모습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불교적 전통으로 살아왔음을 실감케 한다. 인구 2천 800만의 버마는. 2차대전시 한때 미얀마 남자의 10% 가량인 80만명이 비구와 사미승이었다.

오늘날 승려와 사미승의 수는 8만에서 12만명 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전체인구의 90%가 불교도로 알려 지고 있다. 큰 황금탑을 중심으로 450개의 하얀색 불탑이 세워져 있다.

모든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국민들은 스님에게 예배하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보시하는 것을 상식으로 안다. 국민들의 교육도 대부분 사원에서 담당하고 있다. 8~9세의 어린이는 지방사찰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