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 수업
시인 오 세 영
무슨 동기로 시를 쓰게 되었느냐고, 가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 때문이었다고 분명히 대답할 수가
없어 곤혹스럽다. 무언가 확실한 이유를 들어주어야만 될 것 같
은데 실은 내 자신도 어찌해서 처음에 시를 쓰게 되었는지 의식
할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저 우연히 쓰게 되었다든지 운
명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든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식
의 애매한 대답은 질문하는 사람의 호기심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어서 항상 흰눈을 받기 마련이다. 무언가 그럴듯한 ㅡ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될 터인데.
그러나 우연이라는 것, 운명적이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그리고
더 분명한 실존의 조건이 인간의 삶에 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리하여 이러한 삶의 상황에 내던져져 있
는 것 자체가 우연이고 운명인 것이다. 어렸을 때 가난하게 컸으
므로 어떤 아이는 자란 후 돈 버는 일에 몰두했지만 다른 아이는
오히려 돈 버는 일을 혐오하고 또 다른 아이는 돈 버는 일과 관
계 없는 예술의 길을 택할 수 있다. 이 경우 그의 가난과 예술의
길 사이에 어떤 합리적,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삶이
그렇듯이 내가 돈버는 일이나, 권력을 잡는 일이나, 생활을 즐기
는 일을 선택하지 않고 굳이 예술의 길을 택한 것, 그 중에서도
시를 쓰는 일을 택한 것도 가장 솔직히 말하라면 하나의 운명이
요, 우연이요, 성격에서 연유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차적으로 몇 가지 계기를 들라하면 그 나름의 합리와
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나의 내성적인 성격이다. 남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기 표현이 부족하면 홀로 있기를 좋아
하니 외향적이고 행동적인 일, 가령 스포츠나 정치나 사업과 같
은 일은 적성에 맞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나의 성장환경과 천성
적으로 타고난 고독이다. 이러한 환경은 아마도 어릴 때부터 인
생에 대해서 그 나름의 성찰의 계기를 가지게 했으리라 생각한다.
세째는 책을 귀중히 여기고 돈이나 권력을 천시했던 선비 가문의
전통 속에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홀로 독서를
즐겨하는 습관을 길렀는지도 모른다. 네째는 막연하지만 현실을
거부하고 무언가 꿈이나 동경 같은 것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점
이다. 그것은 이를 테면 낭만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가령 세계지도를 항상 책상 앞에 펼쳐놓고 가보지 못한 먼 미지
의 세계를 공상하는 일, 명작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자신의 삶
과 동일시 하는 백일몽 등을 소년시절의 나는 즐겨하였다. 현실
과 담을 쌓고 일종의 자폐적인 내면공간에서 즐기던 이러한 유희
는 어쩌면 당시의 나의 환경에 대한 반동형성이었을지도 모를 일
이다.
어떻든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지니고 있었던 이러한 성격 혹
은 환경이나 생활 습관은 나로 하여금 고독하게 홀로 방에 앉아
독서를 하거나 자기만의 대화를 가령 일기체나 혹은 편지체로 노
트에 적곤 하게 만들었는데 그러던 중 시 비슷한 것도 쓰게 되었
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언제부터 시를 썼는가 하는 시기를 정
확히 대기는 어렵다. 다만 중학교 때부터인 것 만큼은 분명한데
그것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봄 교내 백일장서 〈아카시아꽃〉
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써서 상을 탄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
니까 그런대로 내가 의식하고 그 나름으로 타인에게 인정된 나의
시작은 고등학교 일학년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능 때문인지 우연 때문인지 나는 그해 가을에 도교육의원회가
주최한 도내 중 ·고등학교 백일장 대회에서도 〈풍경〉이라는 제
목의 시를 써서 수상하였다. 이때 심사위원 중 한분이 작고하신
신석정 선생님이셨는데 이로 인해 나는 일약 이 조그마한 소도시
의 학생문사가 되었고 차츰 지방 문단이나 중앙문단에도 관심을
갖는 문학 소년이 되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의 나의 문단 이력
은 대부분의 문인들이 그러했듯이 학교 문예부에 참여하는 일,
교지와 학교신문 편집하는 일, 시내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문학 소
년·소녀들을 모아 문학써클 활동하는 일 따위였다. 이 무렵 나
의 학과 성적은 별로 대학 입시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이 학
교에서 입학 당시 1등 그리고 그 뒤엔 내내 전체 3∼4등을 했는데
분명히 말하거니와 만일 내가 이 「학생문인 활동」을 하지 않았더
라면 졸업할 때까지 수석을 지켰을 것이다.
신석정 선생님과 인연이 된 우리들은 교외 문예 써클을 만들어
자주 선생님 댁을 방문하여 지도를 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선
생님은 구체적으로 작품을 고쳐주시거나 시작을 지도해주신 적은
없고 그저 써가지고 온 시 몇편 가운데서 당신의 마음에 드는 한
두 편을 읽으시고 이 귀절이 참 좋다느니 아니면 이러한 표현이
훌륭하다느니 하는 정도의 지적을 해주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
느 땐가 한 친구의 시를 보시고 그 시 구절 가운데 「…… 납덩이
같은 가슴을 안고 돌아간 오후의 벤취 」라는 시행을 극구 칭찬하
셨는데 나는 그 친구가 부러워 오늘날까지 이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친구는 졸업 후 문학을 포기하였다. 우
리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가까이 찾아가 뵈었던 분으로는 이외
에 작고하신 김해강 선생님, 시조를 쓰시는 최승범 선생님, 그리
고 이 무렵 《현대문학》지에 막 등단을 하신 소설가 정병우 선생
님이 계셨다. 최승범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을 때 깜짝 놀란 것은
사면 벽에 가득 꽂혀 있는 서가의 책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문
학을 할려면 적어도 저 만큼의 책은 읽어야겠구나 하고 감동에 빠
졌던 기억이 새롭다. 그 무렵의 어느 가을 날이었을 것이다. 하
루는 최승범 선생님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유명한 시인 한분이 오
셨으니 우리 써클의 회원은 모두 당신의 댁으로 오라시며 만일 오
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란다. 연락이 늦어 밤9시쯤 우리들
이 단체로 선생님의 댁을 방문했더니 선생님은 어떤 중년의 매우
품위 있고 아름다운 여자와 술상을 마주하며 권커니 자커니 취흥
이 도도해 보이셨다. 우리가 온 것도 안중에 없는 듯하였다. 한
참 만에야 우리를 둘러보시며 인사를 드리란다. 그분이 바로 이
영도 여사이셨는데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나는 그 당시만해
도 이영도 여사를 모르고 있었다. 그분의 시조는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이름도 전혀 들은 바가 없었으니 그저 나 모르는 아주
훌륭한 시인도 계시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다만
지금도 회상되는 것은 저렇게 예쁘신 분이니 시도 아름답겠구나
하는 느낌이었는데 후에 그분의 시조을 읽으면서 이때의 나의 소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무렵 내가 학생 문학 써클을 만들어 지방의 선생
님들을 찾아뵙고 우리들끼리 상호간에 합평회를 가졌던 것은 기
실 시작에 그리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시창작이 어
디 배워서 될 일이며 남과 어울려 돌아다닌다고 해서 될 인인가,
아주 쉽고 당연한 말이지만 혼자 책을 읽고 혼자 명상을 하고 혼
자 체험하고 혼자 쓰는 일밖에 별 뾰족한 묘수는 없는 것이다. 그
리하여도 결국 시가 훌륭한 시가 씌어지지 않으면 재능이 없다는
증거일 것이고 재능이 없는 자가, 할 일 많은 이 세상에서 굳이
시를 써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를 쓰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도 아닌데 말이다. 시인들 가운데서
내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되지 못한 시를 쓰는 사
람이 아니라 시쓰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떠벌리
는 사람 그리하여 시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으며 따라
서 자나 깨나 시만 붙들고 놓지 않겠다는 사람이다. 오늘날 시가
타락하거나 그 본분을 상실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바
로 이런 사람들의 문학행위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떻든 아직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문학 소년으로서 이 정도
의 문학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밖에서 그 누가 무엇이라
고 욕을 하던 내 스스로는 매우 현명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어쨌든 고등학교 시절 나의 시작에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은 헷
세, 괴테, 지드, 헤밍웨이, 도스토예프스키, 릴케, 스펜더, 오든,
니체, 사르트르, 카뮈, 김소월, 정지용, 이태준, 박목월, 서정주
신석정, 김동리, 황순원 등이었다. 그러나 그 뭐니뭐니해도 가
장 훌륭한 스승은 나 자신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은
방황과 모색의 기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학 입시가 눈에 다가왔
다. 전공 결정이 먼저 문제가 되었다. 법대에 가면 판·검사가 되
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애초부터 이런 직종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 외로 가령 상대를 가면 앞으로의 진로가 무엇인가 공대를 가
면 앞으로 무엇이 되는지를 모르는(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입시
지도라는 것이 없었다) 나로서는 일단 문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과
선택에 철학과를 지망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옳은 판단이라고 생
각한다. 문학 창작을 위해서는 철학공부가 보다 본질적이라고 생
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원서에 학교의 직인을 찍기 위해 담
임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선생님 왈 「너 찰학과 졸업하고 굶어 죽
을래. 뭐하러 철학과를 가니?」하고 핀잔이셨다. 내가 사정을
말하니 선생님은 듣는둥 마는둥 일방적으로 철학과 선택의 동그
라미를 면도칼로 갉아 지우고 반 강제적으로 국문학과에 동그라
미를 그려 넣으시더니 「임마 국문과에 가, 국문과에 가면 졸업
후 취직도 잘되고 문학공부도 할 수 있어」하신다.
그러나 정작 절망감은 다음의 순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6:1
이라는 막강한 대학입학의 학과시험을 그 나름대로 치루고 다음
날 면접고사를 한다기에 고사장에 가서 순서에 따라 지정된 방을
노크하고 들어갔더니 권위가 태산같이 높아뵈는 교수님이 딱 버
티고 앉아 계시다가 대뜸 「자네 무엇하러 국문과에 왔는가?」하
고 물으신다. 평소 국문학에 대해서 무언가 다소 알았더라면 교
수님의 마음에 드는 말을 준비해 둘 수 있었을 것을 아무것도 모
르는 나의 엉겹결에 솔직히 「문학하러 왔다」고 했더니「문학, 그
래 무슨 문학을 해?」하신다. 내가 다시 「시를 쓰고 싶다」고 했
더니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노기가 충천할 말씀이 벼락같이 울
린다.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대학이 뭐 시나부랭이 쓰는 덴가?
더욱이 서울대학교에서 학문을 해야지 시는 무슨 시, 자네는 서
나뻘(서라벌) 대학이나 동국대학으로 가게」일갈하시고 쫓아내신
다. 이 일로 하여 대학에 떨어질까 노심초했으나 붙은 걸 보면
그래도 내 성적이 하위권은 아니었던가 아니면 정직하고 우둔한
내 심성을 헤아려 이놈 조금 키우면 뭔가 되긴 될 것 같다고 판단
하신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나중에 입학하여 그 교수님의 대하
고 보니 그분이 바로 심악 이숭녕 선생님이셨다. 어쨌든 가까스로
대학은 입학하였으나 이러한 서울대학의 국문과 분위기에서의 나
의 문학에 대한 절망감은 점점 더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문학은 절망이라는 나무에서 피는
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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