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여행

마리나 콘도에 머물며 (7) 완 / 진주 촉석루

목향 2010. 4. 25. 18:06

 

마리나 콘도에 머물며 (7) / 진주촉석루

 

그때가 지난 2월초인데 이제야 이 단원을 마무리하자니 새삼 게으른 나를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늦은 감은 있지만 끝을 내야 개운하겠기에 마지막 항목을 싣는다.


                       며칠 통영마리나 콘도에 머물며 그곳 지방을 돌아보고 귀로의 길에 끝으로 진주성을 들르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 몫인데다 이미 오래전에 이곳을 관광차 들른 적은 있지만 그간 변화된 모습을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다.

 

전에 왔을 때는 촉석루와 의암, 의기사 정도였는데 이번에 다시 서니 새롭게 등장된 사적물이 많이 눈에 띄었다. 박물관, 김시민 장군 동상, 호국 종각 등등 또한 드넓은 대지에 잔디며 수목이며 잘 가꾸어져 시원스레 시선을 끈다.

 

 

* 촉석문 : 입구정문  

 

 

 

*의기사 

임진외란 당시 (1593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위하여 세운 사당  

 

 

 * 남강은 유유히 흐르고 ...

 

 

 

*의암과 의암사적비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를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

 

 

 

 

*진주 촉석루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은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루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현재의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한 것으로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의기 주씨(義妓朱氏, 1574년 ~ 1593년)는 조선 선조 때의 관기이다. 임진왜란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을 꾀어내어 그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흔히 논개(論介)라 불리는 이유는, 이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였으리라 여겨진다.

 

*호국종각 

 

진주성 호국정신을 기리기위해 진주시가 문화재 육성기금으로1980년에제작되었고 각종문양과 함께

이은상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김시민 장군의 호국 충절 정신을 계승하기위해 건립 (2000.1.1 제막)   

 

 

 

 

 * 점심시간: <남강장어집>에서 장어구이로 맛있게 늦은 점심을 먹고 청주로 ...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서운함이 깔려있고

 

"누가 그랬다. 돌아오는 허전함 때문에 여행을 가지않는다고... "

 

 

* 임진왜란 3대 대첩


'행주대첩'과 '한산대첩', '진주대첩'을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고 한다. 1593년 2월 행주산성에서 전라감사 권율의 지휘에 의해 승리를 거둔 '행주대첩'과 1592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거북선과 수군에 의해 승리를 거둔 '한산도대첩', 그리고 이곳 진주성에서 치러진 싸움을 가리켜 '진주대첩'이라 한다. 진주성싸움은 1592년(선조25년)과 1593년에 있었던 싸움으로 김시민 장군의 지휘 하에 승리를 거둔 1차 전투가 '진주대첩'이며 진주성에는 1, 2차 전투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 후 왜는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차지하기 위해 영.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을 공략한다. 1592년 10월 왜장 나가오카는 3만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왔고 진주성의 김시민 장군이 3,800여명의 관, 군, 민을 지휘하여 7일간 전투를 벌여 우리가 이겨냈다.


다음해 1593년 6월.. 전쟁이 소강상태로 빠진 상태에서 1차 진주성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0만 여명을 이끌고 왜가 다시 쳐들어왔고 우리는 3,500여명의 군사와 6만 여명의 주민이 사투를 벌였으나 11일간의 전투 끝에 패하고 말았다. 2차 진주성전투는 조총과 귀갑차를 앞세워 총력을 벌였던 왜에 밀려 패하고 말았는데, 진주성을 초토화시키라는 도요토미의 명령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2차 전투를 승리하게 된 왜군은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열었고 논개가 촉석루 앞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물에 뛰어든 것이다.

 

*진주성 촉석문앞에 세워져 있는 변영로 시인의 시비

논 개(論介)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 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위의 시는 진주성을 찾는 방문객이면 누구나 한번쯤은

촉석루 앞 촉석문 매표소 입구의 이 시비를 엄숙한 자세로 서서

바라보며 암송하고 논개의 충절을 흠모한다.

 

그리고 역사에 관심있는 진주시민이면 이 시를 한번쯤은 대중들앞에서 자랑스럽게 낭송한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