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여행

천년고찰 신륵사

목향 2009. 3. 16. 16:03

 

신륵사

 

전에도 신륵사에는 몇번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떠 밀리다 싶이 그저 주마간산격이었는데 이번엔 한산 할 만치 사람들도 뜸 한  편이고, 또한 해설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볼 수 있었다. 절 뒤 조금은 가파른 동산에 올라< 왕사 나옹>의 사리탑도 돌아보았다.  보통 사찰이  산속에 자리잡은데 반하여, 이 절은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변에 세워져 운치도 더하고  물빛 역시 아름다워 보는 이의 말음을 시원하고 즐겁게 했다.  

 

<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군 봉미산에 위치한 대한 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기도하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 신륵사 일주문

 

 

* 뎅그렁, 뎅그렁 풍경소리, 산사의  풍경소리는  길손의 마음을 한 층 ...

 

 

 

 

* 범종각 안의  법고< 큰 북> 가 위사진과 같이  받침대에 놓여 있음은 전국에서도 이곳 뿐이란다.

 

 

* 위 극락보전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128호 이다.

 

 

*극락보전 바로앞에 세워져있는 흰대리석의 <다층석탑> 은  보물 제225호로 높이 3m 이다.

 

 

신륵사 조사당(神勒寺祖師堂 

 

 위 조사당(神勒寺祖師堂)은 보물 제180호로,  조선시대의 목조건물이다. 정면 1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었으며, 불단(佛壇) 뒷벽에는 중앙에 나옹(懶翁)과 그 좌우에 지공(指空) 및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태조가 무학대사를 위해 지었다는 설이 전해 온다.

 

 

 

 *<무학대사>가 <나옹화상>을 추모해 심었다는 오백년된 향나무 

 

 

* 나옹화상 사리탑

 

 

* 우리나라에 몇 개 남지않은 회색 벽돌탑 높이 940m 보물  226호 다층전탑

 

 

*나옹화상의 다비가 있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탑

 

                                        

                   * 굽이굽이 유유히흐르는 남한강 줄기 <다층전탑>에서 바라본 강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