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정 일기

제목 : 2004. 3월 21일. 나는 하지 못 할일.

목향 2009. 4. 25. 14:03

제목 : 2004. 3월 21일. 나는 하지 못 할일.

좋은 영향인지 안좋은 영향인지
밤의 침실 창가 전망은 나를 그자리에 계속 머물게 한다.

동그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안락의자위에 강아지처럼 몸을 웅크린채 앉아
창밖만 내려다보면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곤 한다.

나는 창밖풍경을 공항 활주로같다고 생각한다.
끝이 안보일 정도로 도로를 따라 늘어서 켜있는
가로등이 그렇다.
아무도 내리지않는 활주로.
나는 관제사같은 심정으로 그저 내려다보기만한다.

침묵이 흐르고
생각은 끝도없이 흘러간다.

문득, '막 사는 것'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무엇때문에 안되고
누구때문에 하지말아야하고
책임져야하고 약속을 지켜야하고
규범과 예의와 질서를 위해 무한정 절제하고 사는
지금의 삶의 형태에서 벗어나
그냥 '막 한번 살아보는 것'
'막 살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나 '막 살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많았다.
우선 '되는대로 막 사는 것'에 내 스스로 즐거움을 느껴야 했다.
거짓말도 두려워하지않고 진실보다 더 진실스럽게 해야하고
책임감과 자존심도 버려야했다.
양심이란 두 말할 필요없이 '막 살아가는데'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남을 짓밟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해야했다.
미안함이나 수치심 따위는 '막 사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막 살아가기'가 내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되었다.
나는 거짓을 말하면 누구라도 알만큼 얼굴에 티를내기에 할 수 없고
자존심과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약속에 대한 책임감은 더욱 그랬다.
지나치다싶은 도덕관념과 보수적인 생활습관
어려운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약한 마음.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독립심. 등등.....
'막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기'에는 적합한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막 사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기는 커녕
수치심과 자괴감과 양심의 가책을 극심하게 느끼게 될 것이므로
'막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있어, '고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막, 함부로 살아버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체질과 적성에 맞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편이었다.
잔머리를 굴리며 술수와 농간을 즐기고
그런 술수와 농간을 부리며 '텔레토비'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어야
가능한 것이 '되는대로 막 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짧은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나는 결코 '막 살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막 살아간다는 것'
나는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다.........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나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무는 것이
생각이기에, 아예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것이
생각중의 가장 옳은 생각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있으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