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살아있음의 증표 / 나의 수필관

목향 2009. 9. 27. 17:52

<나의 수필관>                              살아 있음의 증표

 

 

 

   어느 모임에서 한 친구가 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친구는 오랜 기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좋은 글을 쓰는 수필가라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초등학교 교사란 말에선 덤덤하던 마음이 좋은 글을 쓰는 수필가란 말에선 약간의 저의가 일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아직 수필가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지 못함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내가 “나의 수필관은 이렇다” 하고 확고한 답을 내리기에는 적이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꽤 오랜 기간을 쓰고 읽는 생활을 지탱해 왔음에 그간 수필을 쓰게 된 동기와 내력 자세에 대하여 적어 보기로 한다.

 70년대 중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이유론 내 직업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초등학교 교사로 아이들의 특활반(글쓰기반)을 맡아서 지도하면서 직접 내 자신이 글을 써야겠다는 내면의 욕구가 일었고 이 충동은 자아실현의 한 방편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이르렀다. 좀더 넓은 의미를 부여한다면 인간이면 누구나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내면의 나를 표출하고픈 간절한 욕구가 스며있을진데 그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또한 부언 하자면 인생의 여정에서 체험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느낀 것을 정직하고 진솔하게 그려 놓는 일은 바로 수필 문학의 본령이며 삶의 본질을 찾는 일이기에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나싶다.

그러나 수필문학은 한 인간의 사람됨이 여실히 노출되는 장르인데다 자칫하면 문학성이 없다는 신변잡기로 몰려 매도당하기 일쑤이고 또한 서로가 공감하는 일이기에 글다운 글을 써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늘 가슴 한편을 누르고 있다.

쓰면 쓸수록 어렵고 힘든 고통이 수반되기에 때론 절필의 위기도 겪지만 결국은 수필에 대한 향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내 삶의 한 동반자로 내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가?

더러는 고민도 하고 열심히 탐구도 하지만, 결국은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 뿐이라는 지극히 통념적인 기본 틀만을 거듭 반복하게 된다. 그러기에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극대화시키는 일이 소명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렇다고 그대로 답보한다는 뜻은 아니다. 커다란 기본 틀은 거기에 준하되 좀더 투명하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 자기만의 개성을 독특하게 살려야 된다고 본다. 이제 본론으로 다가가 내 수필작법에 근접한 사항을 적어 보기로 한다.

 

 첫째, 나는 소재나 주제를 어느 한 특정 영역에서 찾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은 어느 한 부분에 치우쳐 살아 갈 수는 있어도 넓은 의미로 보면 인생살이는 어느 한정된 곳에 머물 수 없고 다양한 문제에 부딪치고 체험하면서 살아내기 때문에 사는 모양새는 다 거기가 거기란 이유에서다. 또한 특정 분야에서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개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한 사물을 보아도 사람에 따라 느낌과 견해가 다르고 같은 악기를 다루어도 그 음색이 동일 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개인적 가치관, 성향,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특유의 빛깔을 그려 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그러기에 소재를 광역 (모든 사물, 자연, 체험, 사유 등)으로 찾되 되도록이면 인간의 본질과 진실을 담을 수 있는 소재를 찾는데 주력한다. 감각적인 것보다는 좀 깊이 있고 무게 있는 쪽으로 기울여 보자는 것이다.

 

 둘째, 진실되고 정직한 삶과 글을 쓰고 싶다.

정직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일 때 독자층에 감동을 줄 것이며 정감의 교류가 이어지고 예술적 향기와 철학적 교시가 들어있다고 하겠다.진실되고 성실한 삶,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사물을 꿰뚫는 안목과 풍부한 감성이 여과되어 농축되었을 때 좋은 글이 될 수 있겠다. 수필은 곧 인품의 문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이유로 기교나 말장난에 그치는 수식어의 남용을 막고 담담하게 쓰고자 노력한다.

 

 셋째, 어렵게 쓰되 쉽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

한 편의 글을 써서 발표하기까지의 노력과 고통이 얼마인지는 아마도 글을 써 본 사람만이 상통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쉽게 읽힌다고해서 결코 쉽게 쓰여 진 글이 아니란 뜻이다. 독자가 부담 없이 공감하고 긍정 할수록 필자는 그만큼 더한 고뇌의 결정체 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탄탄한 문장력을 들 수 있겠다.

문학은 곧 언어표현을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에 문장력 없이는 바르게 나타낼 방법이 없음이다. 알맞는 어휘 선택, 문단의 짜임, 연결 등 문장의 수련을 갈고 닦을 일이다.

고로 나는 ‘그 사실에 그 낱말 하나 밖에 없다’ 는 말과 ‘원고지 옆에는 항상 가위를 놓아두어야 된다’는 말을 상기하며 집필에 임한다. 토씨 하나, 부호 하나도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전달 의미는 달라진다.

자칫 자기도취, 자기포장에 빠지거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글을 막기 위함이다. 전에는 줄 간격이 없는 백지에 초고를 쓰고 원고지에 옮기면서 퇴고를 했지만, 컴퓨터가 보편화되고부터는 수정이 편리한 컴퓨터를 처음부터 이용한다. 또한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은 서로의 부추김도 의식 전환의 한 방편일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모든 일은 ‘하고 싶다’ 든가 ‘해야 한다’는 동기 의식이 뚜렷해야 실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랑 같아 조금은 쑥스럽지만 내가 글쓰기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계기는 7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그때 여성지 ‘주부생활’ 문예란에 수필 한 편을 응모했었다. 처음으로 쓴 작품이 뜻밖에 최우수로 입상되었고 그 작품의 심사평을 고 ‘이병주’님이 하셨는데 동양화의 여백에 비유하면서 꽤 넓은 지면을 빌어 과찬일 정도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은 큰 용기를 갖게 한 일이다. 또한  중앙일보 독자문예란에 시조와 시를 투고 했는데 연이어 선에 들기도했다.

 

 바로 그 여세를 몰아 80년 초 대한교육연합회에서 발행하는 교단 작가배출의 새교실 지우문예 관문(3회)을 최단거리 선수로 골인 할 수 있었음이 더한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충북수필’ 창간호에 발표되었던 졸작 ‘완행열차’ 가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본인도 잘 모르는 사이에 본격 수필문학지 ‘한국수필’초회 추천을 받게 되니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의욕을 상승시켰음은 물론이고 문학의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된 것이다.

 

 수필은 곧 자신의 얼굴이고 마음의 거울이며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에 나도 동감한다. 그러기에 수필 작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이 진실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러한 인간적 바탕 위에 사물을 냉철히 관찰하고 바르게 비판하며 풍부한 감성과 해박한 지식을 쌓아 문장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써질 것으로 믿고 있다.

 

 일생에 단 한 편이라도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정말 격 높은 글을 쓰고 싶다. 해 질 녘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유연하면서도 맑고 여운이 있는 그런 글이 써지길 기대하고 부단히 노력할 일이다.

그 일은 곧 내가 살아 있음의 증표이고 삶의 동반자이며 내 문학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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